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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봄 정보 12·12 군사반란 요약 현재 상황 비교 처벌 다시보기 실제인물 다시보기 출연진

by E-MERALD 2024. 12. 12.

서울의봄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발생한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의 긴박한 9시간을 생생하게 재현했습니다.

항목 내용
감독 김성수
각본 정현수, 이영초, 김은찬, 이지민
제작 김원국
출연 황정민, 정우성, 이성민, 박해준, 김성균 
촬영 이모개
편집 김상범
음악 이재진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
배급사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2023 11 22
상영 시간 141
언어 한국어
관객  천만  돌파

 

서울의봄 줄거리

영화는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의 9시간 동안,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과 이를 저지하려는 진압군의 대립을 그립니다. 보안사령관 전두광은 군사반란을 계획하고,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은 이를 막기 위해 분투합니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군 내부의 갈등과 긴박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서울의봄 등장인물과 실존인물 대조

영화에서는 실제 인물들의 이름을 변형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주요 등장인물과 그에 대응하는 실존인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을 통해 영화는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2.12 군사반란 요약

발생 일시: 1979년 12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까지
주도 세력: 신군부(전두환, 노태우 등)
사건 개요: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 이후 정국 혼란이 이어지던 중,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심이 된 신군부 세력이 정권 장악을 위해 군사반란을 일으킴.
  •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를 체포하고, 육군 내 주도권을 장악.
  • 수도경비사령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며 군사적 반란 성공.

배경:

  •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권력 공백 속에서 정권을 장악하려는 신군부의 야망.
  • 기존 군부와 신군부 간의 권력 충돌.

결과:

  •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군사적 지휘권을 장악하며 정권 기반 구축.
  • 이후 1980년 5월 비상계엄 확대 및 5.18 민주화운동 진압으로 이어짐. 


12.12 군사반란과 현재 상황 비교

유사점

  1. 권력의 위기 속 혼란
    •     12.12 군란은 박정희 사망 이후 권력 공백이 원인이 되었고, 현재의 계엄 논란은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대립에서 비롯.
  2. 군사적 개입 논란
    •     군의 정치적 개입 및 권력 쟁탈이 중심 이슈로 부각.
  3. 민주주의 위협
    •     모두 민주주의 체제를 훼손할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

차이점

  1. 권력의 구조
    •     12.12는 군 내부 쿠데타 성격이 강했으나, 현재 계엄 논란은 정치적 대립에서 군사적 개입 가능성을 두고 벌어진 논쟁.
  2. 시대적 배경
    •     12.12는 독재정권 붕괴 후 군사정권 시기로의 회귀였으나, 현재는 헌정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계엄 가능성을 우려.
  3. 사회 반응
    • 12.12 당시 군사적 대응에 국민이 개입할 여지가 적었던 반면, 오늘날 시민사회는 훨씬 적극적으로 반발. 

12·12 군사반란 처벌 결과

  • 1980년 신군부 정권 수립:
    전두환이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대통령직에 오름.
  • 1995년 반란 주도자 처벌:
    김영삼 정부 당시 특별법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 등 반란 주도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이루어짐.
    • 전두환: 반란 및 내란죄로 무기징역 선고, 추징금 2,205억 원.
    • 노태우: 징역 17년, 추징금 2,629억 원.
  • 특사로 석방:
    1997년 김대중 정부 시기, 국민통합 명목으로 사면 및 복권.

서울의봄 12·12 군사반란 요약 정리

12.12 군란은 군사반란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역사적 사건으로, 오늘날 계엄 논란과 민주주의 훼손이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권력 구조와 시대적 배경의 차이가 큽니다. 당시의 주도자들은 한 차례 처벌받았으나 이후 사면되었으며, 현재 상황에서는 시민사회의 민주적 대응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